이제는 조금 괜찮아졌지만, 서울에 도착한 뒤로 일주일넘게 주변사물들이 모두 모두 환상으로만 보였었다. 태국여행의 마지막에 푸켓에서 들은 생존 경험담들 때문이었을까. 귀국 비행기를 타기전에 가끔씩 한밤중에 깨어나곤 했었다. 어린애들이 처음 죽음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일 때에 겪게 되는 혼란과 깊은 고독 같은 것을 끄라비의 호텔에서 한밤중에 느끼곤 했었다. 귀국하는 비행기에서의 다섯시간은 너무 답답해서 심장이 터지는 것 같았다. 다시는 비행기를 못타겠구나, 싶었다. 그게 폐쇄공포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꽤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구로동의 내 집에 돌아와서 다섯달만에 내 방에 들어섰을 때에도, 지하철을 기다리며 서있는 동안에도, 바로 내 눈앞에 보이는 것들이 모두 환상일 뿐이고, 내 등뒤에는 까만 암흑만이 있는 것 처럼 느껴졌었다. 그 느낌이 너무 싫어서 과거에 내가 알던 사람들을 만나러 다녔다. 아직도 케이티에프에 뭔가를 납품하는 사람들, 삼성에서 하청받은 일 때문에 밤샘하는 사람들, 데이터베이스로 뭔가를 만들거라고 말하는 사람들. 그리고, 서울을 돌아다녔다. 명동, 종로, 강남, 삼성… 그렇게 자꾸만 서울에 익숙해졌다. 이제는 내 등뒤에도 사람들이 걸어다니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까만 암흑같은 것은 사라졌다. 다행이다.

게다가 어깨를 치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익숙해졌다. 항상 타인에게 부딪히지 않으려하고, 엘리베이터든 호텔 복도에서든 서양식 예의를 지키는 곳에서 지내다가, 서울의 터프한 아저씨 아줌마 고삐리들을 대하는 것이 처음에는 무지하게 힘들었었다. 존나, 씨팔.. 그런 말들이야 어디 욕에 속하기나 하겠는가. 일상어일 뿐이다. 그래도, 떠나기 전보다는 한국인의 터프함에 대해서 “아 역시 서울에서 살아가려면 저 정도는 되어야 하는 걸꺼야” 라는 객관적인 시각을 갖게 되었다. 시끄러운 핸드폰질에 대해서도 많이 너그러워졌다. 눈에 보이는 유일한 여행의 소득인가보다.

집에 있는 컴퓨터는 아직도 고치지 못했다. 어딘가 하늘에서 노트북하나가 나에게 떨어지기를 바라는 중이다. 가급적 1Kg 이 안되는 가볍고도 빠른 놈으로. 컴퓨터가 안되니까, 시간이 많이 남는다. 그래서, 자꾸 잔다.

2년만에 신사동에 지오텔에 놀러갔다. 세상에. 그때 그 사람들이 모두 모두 “이사” 라거나, “팀장” 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나는 놀고 있었는데 말이지.

무슨 일을 해야할지, 취직은 해야할지, 아르바이트만 해야할지, 뭘 먹고 살지, 아무 것도 모르겠다. 일단은 집에 밥은 있다. 오늘도 어머님이 삼만원을 주고 나가셨다. 기쁘다…

 

3 Comments

  1. 와리 February 15, 2005 at 10:07 am

    잊어버리고 다시 생각나고 다시 잊어버리고..
    수없이 잊어버리고 삽니다.
    지금도 나의 뇌세포는 죽어갑니다.
    연결되어 있던 Link는 하나둘씩 끊어져가고..
    알고 있던 기억마저 희미해져 갑니다.
    미래가 불투명한 세상에
    뭘 믿고 살아가는지도 잊어버립니다.
    나는 무엇으로 기억될래나?

    라고 시나 쓸 처지가 아니네요. 흠흠~~
    이 많은 일 언제 다 하나~~ 쩝~ :-p

     
  2. 쎄리 February 17, 2005 at 2:28 am

    서울에서의 새로운 여행이 시작되는거져…
    조금은 견기기 힘들지라도
    자신도 모르게 어느새 적응해버리게 되져…

    오래 여행 갔다오면
    사물이나 주위의 일들을 참 편안히 볼 수 있는
    그런 느긋함이 생격서 좋던데..
    그 느긋함이 좀 빨리 없어져서 많이 아쉽기도 하구요.

    잠시 베트남 여행 갔다왔어요.
    jinto님 글 읽고 갔었으면 많은 도움이 되었을텐데,
    다녀와서 알아서 아쉽네요.

     
  3. mook1999 February 24, 2005 at 5:23 am

    지난 번에 뵈었을 때 홈페이지 말씀하셨던 것이 생각나서 함 들어와 봤습니다. 어딘가에 메이지 않고 자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용기가 참 부럽군요. 계속 익숙한 공기 속에서 익숙한 사람들과 살아가면서도 문득 그 모든 것들이 낯설어질 때가 있습니다. 지구에서는 보이지 않는 달의 반쪽을 발견했을 때 처럼요. 종종 글 올리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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