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야곡...
어제 밤, 일주일 예정으로 중국에 갔던 친구가 한달만에 “쟈스민 차”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의 프로젝트가 성공해서, 그가 기원하듯 어서 결혼하게 되기를 바랬다. 그리고 새벽 택시를 타고 밤의 서울 거리를 보았다.
라디오에서 새어나오던 노래. 마지막이 “서울엘레지” 로 끝나길래 소리바다에서 검색을 세번이나 했다. 하지만 제목은 “서울 야곡”. 현인 아저씨의 목소리다.
나에게는, 봄비를 맞으면서 충무로를 걸었던 기억이 분명히 있다. 남대문시장 건너편에서 살았었고, 서울역 뒤편에서도 살았었다. 일부러 명동에 있는 중국대사관 골목을 지나서 종로서적까지 걸어갔었고, 삼청동으로 올라가는 길까지 자꾸만 걸어다녔었다.
멀리멀리 떠나기를 기원하면서도, 사실 내가 밟고 다니던 땅을 떠나지 못하는 붙박이장 같은 종류의 사람인가.
구글검색중에 발견한 서울야곡에 대한 어떤 글이다.
http://www.parksviewpoint.com/sub2_list.htm?page=1
별것 아닌 일에 괜히 혼자서 감격하고, 감동하는 일이 있지 않습니까. 지금부터 말하려는 나의 경우가 바로 그런 예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날씨가 한창 덥던 어느 날, 언론계 친지 몇 분과 각자 삶은 닭 한 마리씩으로 저녁을 같이하고, 헤어지면서, 조의진 KBS 제작본부장으로부터 선물을 받았습니다. 가요무대 100선이라는 CD 묶음이었습니다. 그때는 모처럼 이사를 해놓고, 짐 정리에 골몰하던 참이라, 알맹이를 들어보지 못하다가, 추석날인 어제 저녁에야 문을 닫아걸고 혼자서 틀어보았습니다. 때로는 가사를 따라 흥얼거려 보면서.
그랬더니, 이게 웬 일입니까. 왈칵 눈물이 쏟아지는 게 아닙니까.
봄비를 맞으면서 충무로 걸어갈 때 쇼윈도 글라스엔 눈물이 흘렀다 이슬처럼 꺼진 꿈속에는 잊지 못할 그대 눈동자 샛별같이 십자성같이 가슴에 어린다 보신각 골목길을 돌아서 나올 때에 찢어버린 편지에는 한숨이 흘렀다 마로니에 잎이 나부끼는 네거리에 버린 담배는 내 맘같이 그대 맘같이 꺼지지 않더라 네온도 꺼져가는 명동의 밤거리에 어느 님이 버리셨나 흩어진 꽃다발 레인코트 깃을 올리며 오늘밤도 울어야 하나 바가본드 마음이 아픈 서울 엘레지
이쯤 하면, 이 노래가, 소설가 유호가 작사, 가수 현인이 직접 작곡하고, 노래한, 유명한, 서울 야곡이라는 것을 다 아실 것입니다. 퍽 오래된 노래인데 이제 와서 내가 눈시울을 적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물론, 나는 봄비를 맞으며 충무로를 헤맨 경험도 없고, 보신각 골목길을 돌아 나오면서 한숨 어린 편지를 찌어버린 일도 없습니다. 명동의 밤거리에서 마음이 아파 울어본 일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제 와서 뜻하지 않게 눈시울을 적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다 나이 탓인 것 같습니다. 그밖에는 별다른 이유를 발견하기 어려우니까요.
나이와도 관련이 있겠지만, 나는 탱고 리듬에 감동하는 편입니다. 경쾌하기도 하고, 약간 슬프기도 한, 탱고 선율에 나는 언제나 매혹됩니다. 서울 야곡도 그런 곡입니다. 또 충무로니, 보신각이니, 명동이니, 하는, 무대는 우리 시대의 단골이었습니다. 지금 젊은이들은 아마도 강남이겠지요. 가수 현인의 시대도 우리 시대입니다. 그 때는 무엇보다도 가창력이 중시되었지요.
서울 야곡은 듣기만 할 것이 아니라, 현인의 흉내를 내며, 따라 불러보면, 한층 더, 가슴에 와 닿는 느낌인 데,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하신지요. 특히, 각 절의 끝부분이 사람을 울립니다.
P.S. 중구청에서 공익근무요원을 했던 나로써는 봄비를 맞으면서 충무로를 걷는 일은 한번쯤은 겪을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뭐.. 이별의 편지를 찢기위해서.. 따위는 아니었다.
댓글
atopos : 저도 한 10여년 전에 봄비를 맞으며, 바람도 쐬며, 햇살도 받으며 충무로 거리를 자주 거닐던 시절이 있었어요. 그곳에서 명동에도 들렀다가 보신각을 지나 집까지(안국동) 마냥 걸어왔던 적도 많았고…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가 제가 이제껏 살아오면서 가장 활기차고 꿈이 많았던 시절인 것으로 기억됩니다. 이 노래를 들으니 그 때 생각이 아주 많이 나네요.. 이젠 아련한 기억들.. (2003-09-05 02:19: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