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부터 그랬는지 어느 시기부터 이러는건지 모르겠다. 난 항상 걱정을 한다.
요전에도 쇼파에 기대 편히 쉬려는데, 마음속에서 ‘일해야지’ 하는 소리가 들렸다.
‘혹시라도 회사에서 일 못한다는 평가를 들으면 안 되잖아, 그러니까 어서 일해’ 라는 재촉이었다.
잠깐동안 망설이다가 다시 어깨에 힘을 풀고 쇼파에 주저 앉았었다. 목이랑 가슴이랑 한군데씩 긴장을 풀며 쉬려했지만, 이번에는 다른 녀석들이 하나씩 찾아왔다. 내가 지금 다치거나하면 어쩌지? 만약에 가족중에 누가 아프면 어쩌지? 그렇게 이 녀석 저 녀석들이 쇼파위에 앉아있는 내게 차례로 다가왔다.
오늘도 아들과 둘이서 하루를 보냈다. 저녁 먹이기, 숙제, 이닦기까지 해결하고 재우기 미션을 수행하는데 갑자기 ‘죽으면 어떻게 되는건가요’ 라는 문제를 주심.
아들아… 그건 나도 잘 모른단다.
가끔 잠자리에서 엄마한테 말하는 걸 들은 적은 있는데, 나한테 직접 물어오니 뭐라도 얘기는 해야했다.
“아들, 얼마 전에 이빨하나 빠진 적이 있었지? 그거 빼기 전에 며칠동안 계속 치과 갈 걱정만 했었지? 그리고는 어이없게 쑥빠져서 허탈하게 웃었었지? 걱정할 때 얼마나 심각했었는지 기억하니? 빠지고 나서는 어떤 느낌이었지? 빠질 당시에 느낌을 보면 하나도 걱정할 필요가 없는 거였지?
가급적 어두운 글은 읽지 않으려고 한다.
진지한 것들은 어둡게 마련이어서, 가끔은 어두운 글일 것을 알면서도 들고다니는 경우가 생긴다.
“시스템은 억압적인 것이다.” 라고 정하면, 그건 억압적인 것이 된다. 세상은 자유로운 곳이다, 라고 정의하고 나면, 세상은 다시 상당히 자유로운 곳이 되기도 한다. 대개의 중요한 문제들은 자기 주관대로 정의할 수 있다.
이런 문제들은 언제나 계속 등장하고, 작은 문제들을 해결하는 과정에서도 부딪치게 된다.
나 자신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트는 것이 가능할까. 그런 행동은 억지일까. 혹은 긍정이니 부정이니 하는 것은 존재하지도 않는 것은 아닐까.
오늘 수업에서 기억나는 것을 적어둔다.
얼룩말 얼룩말이 한가롭게 풀을 뜯다가, 사자에게 공격당해 날카로운 이빨에 물려 죽는 상황을 떠올려보라. 쫓기는 동안이나 죽어가는 동안 얼마나 강한 스트레스를 받겠는가. (너무 생생하게 떠올리지는 말자.) 원래 투쟁 혹은 도피, 라는 스트레스 반응은 이럴 때 필요한 장치였다.
위협과 도전 스트레스란 “내가 위협으로 인지하는 것” 이라고 했다. (로버트 새폴스키?)
얼룩말은 당연히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만 스트레스를 받는다. 문제는 사람.
우리는 지나가는 사람이 나를 보고 살짝 웃기만 해도, 혹시 나를 비웃는 건가, 의심하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