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사람들

이틀동안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허물없이 대해주었다.

그들은 나름의 치열한 고민을 거쳐서 거기까지 갔으리라. 가끔은 유치해보이기도 했지만, 돌아서 생각하면, 사실… 타자가 보아 유치하지 않은 고민이 어디에 있겠나. 거기에서의 이틀동안 진지한 고민 같은 것을 하지못했다. 산책하기 좋았던 소쇄원도 사실 관광지화 되어가는 것 같았고, 어쩌면, 삼성이 만들었다는 희원과 그다지 다르지 않을 수도 있어보였다.

오히려 깊은 생각에 적절한 때는, 지리산 자락에서 새로 사귄 이들과 술을 마신 후, 숙소에서 누워, 멀리서 들리는 개구리 소리와 산에서 풍겨오는 나무 향기를 느끼는 순간이었다.

도전과 응전을 생각하다, 어쩐일로, 할머니가 업어주신 덕분에 편안함을 누리고 대신 오다리를 갖게된 것 따위가 떠올랐다.

그렇다면, 혜택을 누리는 것은 반드시 이후의 불이익을 가져오는가? 편의와 발전을 위한 모든 노력은 모두다 쓸데없는 짓인가. 따라서, 우리는 발전을 포기하고 현상유지를 향해서,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를 방향전환 해야할까.

억지스럽고, 쓸데없는 진지모드에서 잠깐 끄적여 보았다.

기대하는 것은 그 결과가 구현되기 전에 그것이 좋을 것이라고 예측했기 때문에 가지는 것인데… 그 예측이 앞서의 ‘발전은 올바른가’ 따위의 이론과 만나면, 사실은 내가 기대한 결과가 정말로 좋은 것일지는 알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더 큰 기대’를 하게되는데, 이것은 내가 품게되는 여러가지 ‘기대’들이 궁극적으로도 올바른 것이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이때부터는 믿음이요, 종교가 되어버린다. 궁극적으로까지 올바르려고 하는 것 자체가 오류이므로, 인식할 수 있는 최대치의 영역에서 이론과 감각을 동원한 최대의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유일한 ‘최적해’라고 할 수 도 있겠다. 과연, 궁극적으로 올바른 것이 무엇인지를 탐구하는 것이 올바르겠는가, 지금 보기에 올바른 것을 수행하는 것이 올바르겠는가. 아니면, 이런 끄적임은 쓸데없는 짓인가.

함양, 녹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