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끝에 무엇이 있는지, 혹은 우리가 어디까지 와 있는지 알려주는 책이다. 다만 꽤 현학적이다. 미국에서 잘나간 책들에서 자주 본다.
카오스나 복잡계에 대해서 이미 들어본 사람이면 조금 더 읽기 쉬웠을 것이고, 이미 그 새로운 패러다임이 많이 완성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겠다.
철학에서 시작된, 예술가가 시작한, 혹은 수학자가 제시한 어떤 개념 하나가 주변으로 퍼져나가고 이것이 사회와 시대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커지는 경우가 있다.
복잡계나 카오스로 불리던 것이 가지는 진짜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 개념이 어디까지 와있는지 이 책을 읽으면서 탐햄해보자.
코몰에 오랜만에 나갔습니다. 불경기..는 어떤 면에서는 행복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갈수록 짧아지고, 짙어지고, 이뻐지네요. 그냥 덤덤하게 보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 합니다. 그건 그렇고.
강유원의 공부법(발견한 곳)
을 읽고서 그의 공부법자체가 해봄직하다고 느끼기도 했고, 소개된 몇권의 책들이 탐나기도 했더랬습니다. 게다가, 제가 그동안 읽었던 책들이 너무 잡다한 것도 같고.
아무런 내용도 모르면서 그저 멋있다고 비트겐슈타인을 읽어보(려다가 포기하)기도 하고, 처세술부터 우주과학이나, 심령술까지 이것 저것 많이 읽은 것은 같은데, 도무지 줄거리가 없더라는 겁니다.
철학사 책을 읽는다고 해서, 없던 줄거리가 당장 생겨날리는 없습니다만, 그래도, “강유원의 공부법”이란 것이 지금쯤 택해볼만한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책을 읽기 전에, 책의 저자에 대해서 들은 것이 있다면, 읽는 동안 약간의 색안경을 쓰게된다.
예를 들어, 책을 쓴 이가, 나이들어 큰스님 소리를 듣게 되었어도 신도가 절을 할 때면 항상 함께 합장을 하였다 던가, 장좌불와 - 눕지않고 자지않음 - 을 말그대로 실천하였다 던가, 혹은 쌀 한줌으로 하루를 연명하면서 깨우침을 얻기 위해 토굴생활을 했다는 것을 들으면 그렇다.
똑똑하다는 소리를 들은 한 청년이 삼십년 넘게 토굴속에서 하루 한끼로 정진하였다면, 그의 설법을 읽으면서 완전히 객관적이 되는 것은 힘들다.
28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이순신에 관해 글을 썼던 작가 김훈이 대상을 받았다. 이번 작품집은 돈이 없는 관계로 동생에게 빌려서 읽었는데, 김훈의 수필은 그럴싸하긴 했지만, 강한 무엇이 없었다. 그저 그랬다. 그 다음에 실린 소설도 그저 그랬다.
그저 그런 소설들이네, 라고 생각하면서, 중간에 실린 소설들을 다 건너뛰어버렸다. 글은 그럴싸하고, 페이지수도 잘 채워주고 있지만, 마치 나의 블로그처럼 말만 많을 뿐 임팩트가 없었다. 모른다, 그중에 좋은 작품이 있을지도. 하지만 너무 더워서 읽고 싶은 마음이 싹 달아나 버렸다.
1969년 봄이었다
그 날, 3학년 최초의 종합시험이 끝났다. 아마도 내평생 최악의 성적이 될 것 같았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나의 성적은 끝없이 하강해 갔다.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다. 부모의 이혼, 동생의 갑작스런 자살, 나 자신이 니체에 경도했다는 것, 할머니가 불치의 병에 걸렸다는 것, 때문이라고 하면 거짓말이고, 그냥 공부가 싫었을 뿐이다.
류는 고등학교 3학년의 선생들을 “우리를 가축으로 만드는 자본주의의 앞잡이”라고 한다. 우리는 가축이 되어가는 걸까. 가축과 인간의 차이는 뭘까.
할머니 밑에서 자란 장남은 예의 바른 인간이면서,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 때는 견딜 수 없는 인간이기도 하다.
저자는, 예수의 일생과 성당기사단 따위의 음모론에 관한 책을 너무 좋아한 것 같다.
나도 “예수의 후손은 사실은 바라바”, 아니면 “사실은 나폴레옹” 같은 얘기들을 너무 많이 읽다보니, “사실은 철가면이…” 라고 해도 놀라지 않는다. 하지만, 결론까지 와보니…
이건 너무 뻔한 얘기였잖아. 역시, 내가 책을 써봐도 같은 결론이 나오오, 라는 얘긴가?
예전에 “헤르메스의 기둥” 을 읽을 때는 과도하게 흥분했었는데, 지금 보면 다들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다.
선배와의 잡담중에 “사실 이황이 고봉과 싸운 이유는 그들이 서로 부자지간이었기 때문이었는데…” 따위의 한국적 음모론이 나온다면 그럴싸하지 않을까, 공상했었다.
삼차원 적인 이미지이며, 공간의 이동으로 시간의 흐름을 흉내내기도 하는 홀로그램. 한번도 본적은 없지만, 들을 때마다 내가 가진 상식의 어딘가에 구멍이 뚫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초능력 관련한 세미나에서 만난 방사선 기사분의 추천으로 읽게 되었다. 사실 사회의 이곳 저곳에는 여러가지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당신의 옆에도 나처럼 초능력에 미친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어제 찍은 MRI에 초능력자의 염력이 녹아있다던가, 지금 쓰고 있는 워드프로쎄서의 버튼들이 사실은 하룻밤 명상의 결과라던가, 그런 얘기다.)
어쨌든 이책은 그 홀로그램이라는 현상에 대한 책이고, 또, 그 현상을 심리학자, 물리학자, 초상현상 연구자들이 어떤 식으로 받아들였는지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이번엔 요시모토 바나나다.
문장자체가 이런 저런 아기자기함으로 가득차있다. 자신에 대해서 솔직한 시선을 가지도록 유도하는 대목도 많다. 여행하는 동안 계속 이 책을 읽었고, 그래서 수첩에는 아기자기하면서도 우울한 문장들만이 남게 되었다. - 베트남에서 106~ 107p
라고 수첩에 적어놓았다. 중요한 부분인 것 같지만, 지금 읽어보면 왜 적었는지 알 수 없다. 아마도, 이국의 하늘을 바라보며, 가족에 대한 문장을 읽으려니 괜시리 감동같은 것을 느꼈었나보다. 그 옆에 적어놓은 210p 는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이었고, 224p 는 혼자서 남자를 바라보는 장면이었다.
이 책을 어떻게 추천해야 좋을까.
나는 서른 넘은 지금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른다고, 혼자서 자책하는 인간이고, 어쩌면 평생 이러고 살면서 투덜거릴지도 모른다고까지 생각한다. 그런 인간이다. 혼자서.. 괜시리 고민만 많다.
저자 윤석철은 우리나라에서 독문학, 철학, 물리학을 전공하고, 미국에서 전기공학과 경영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책을 읽는 내내, 나는 그가 어떤 학위를 가졌는지 자랑하는 글을 한 줄도 볼 수 없었다. 개인의 이력은 책의 맨뒤에 가서야 약간만 언급한다.
이 책을 발견한 것은, 서점에서 서성이다가, 그의 사생활과 연구활동에 대한 글을 읽었을 때였다.
간만에 책에 관한 로그.
이 책을 처음 읽은 것은 2003년 8월, 작년 이었다. 다 읽고난 후에, 언젠가 다시 읽어볼만 하다, 했었는데, 오늘에야 다시한번 읽게 되었다. 한번 잡으면 두시간정도면 다 읽을 수 있는 분량이다.
사실 처세나 성공에 관한 책은 서점에 나와 있는 것들을 모두 다 읽어도 상관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써먹을 수 없는 것도 있고, 웃기는 글도 있긴 하지만, 가끔 자신에 대해서나, 일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안사려다가 산 책.
이런 류의 책들 중에는 한번읽고 책장에 꽂아놓으면 다시는 펴보지 않는 녀석들이 있다. 그래도, 결국은 사버렸다.
… 하지만, 서양책이라니. “선배님, 저는 꼬부랑 글씨라면 읽을 줄 아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선배는 그때 이렇게 딱 잘라 물었다. “자네 스스로를 기술자라고 생각하나?” 당혹스런 질문이었다. “아니, 뭐 그런 당연한 사실을 물어보십니까?” 그러자 선배가 이렇게 말했다. “기술자는 말로 떠벌이는 사람이 아냐. 그림과 도면을 뚫어지도록 쳐다보면 저절로 이해될 거야” ….
이 독일책을 나는 이후 20년동안 매일 보았다.
집은 보수적인 것이라, “온돌”이 정착하는데에 거의 천년에 가까운 세월이 걸렸다. “한옥으로 다시 읽는 집 이야기” 라는 책은 그런 역사와 문화 그리고 건물에 대한 이야기다.
주로 한옥을 이야기하지만, 집의 구조에 집착해서 일일이 설명하는 책이 아니다.
현재의 가옥 구조에서 TV를 향해 쇼파를 놓아둔 거실구조가 장식장의 높이를 30센치 내외가 되게끔 만들었다.
라던가,
70년대에는 30평형 아파트에도 식모방이라고 해서, 부엌의 바로 옆에 따로 방이 있었다.
라는 식으로 현재와 연결지어주는 부분이 많아서 읽기 좋았다.
바알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어느 만화에서 였다. 심해에 잠수정이 내려갔는데, 이상한 사람이 잠수복도 입지 않고서 그들 앞에 나타난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말해준다. “바알시이파” 라고.
하지만, 그 이름을 들은 허접 캐릭터들은 “뭐? 발시려 아파?” 라고 웃긴다.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말하지는 못하지만, 바알에 대해서 들을 때마다 떠오르는 장면이다. 바알은 지금은 그냥 아무것도 아닌 신으로 알려져있지만, (사실 신이라고 하기도 뭐하지만) 히브리성경에는 한참동안이나 “바알”을 공격하는 말들이 나온다. 그것은 왕이 바뀌고 시대가 흘러가도, 이미 너무 넓게 퍼져있던 기존 종교를 없애버리기가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다.
리퍼러를 보고 있었다. 가끔 흔적이 남아있지만 누군지는 전혀 짐작이 가지않는 분이있다. 그분은 웹페이지에 북마크를 적어놓으시고는 가끔 들어오신다.
거기서 발견한 “곰 아줌마 이야기” 일단 위시리스트에 적어둔다. 적다보니, 전에 적어둔 “다이아몬드 에이지”가 보인다. 책사는 것도 과소비야.. 라고 생각한다.
그리고는 이분이 지난주에 과소비한 것을 발견했다. 반가운 동지를 발견(?). 과소비 내용중에 “‘책벌레’는 사람들이 재미없다길래 주문.” 이라는 대목에서 존경심을 느낀다.
“곰 아줌마..“에서 인용해놓으신 구절이 “박민규”의 것이라 나도 재인용해본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세상을 띄엄띄엄 알고자 하는 이 나쁜 습관을 고쳐나가는 것이었다.
몇달간 스택에 쌓여있었는데, 꺼낸지 이틀만에 다 읽어버렸다. 꽤 빨리읽히는 책이다.
“시장에 모든 것을 맡겨라!” 로 알려진 애덤스미스. 그가 사실은 “경제학은 도덕철학이다” 라는 말에 더 무게를 뒀다고 하는 내용이다.
우리 자신의 행동의 타당성에 진심으로 신중을 기하는 것이… 덕의 진정한 정수이다. - 애덤스미스 도덕감정론
얼마전에 내가 이익을 취하는 것이 정당한 행동일까에 대해서 고민했었다. (딱 열흘전이네..) 이익을 취하는 것이 정당한가에 대해서 고민했다는 것이 너무 현학적이라고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러니까, 좀 웃기긴 하지만 - 암튼 고민했었다.
그저께까지 엘러건트 유니버스를 읽었다. 90학번인 내가 기억하는 물리학은 “슈뢰딩거의 고양이” 까지.
고양이는 확률로써만 존재한다, 고 하는 것이었는데. 엘러건트 유니버스의 앞쪽 절반은 아는 이야기이고, 뒤쪽 절반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언젠가 “초끈이론”이라는 특집기사가 월간뉴튼에 실렸을 때에 대강 읽어버렸던 때문인지, 끈이론이라고 하면 뭔가 이상한 말로만 들린다.
“쿼런틴“을 읽으면서 가물가물했던 내용들을 앞쪽 절반에서 아주 잘 설명해주고 있다.
이 책의 장점은 이상한 비유로 양자역학이나 상대성이론을 더욱 이해하기 힘든 것으로 만들어버리지 않는다는 점. 가능한한 정확한 비유를 사용했다.
설을 맞아 옛날이야기 하나.
다동에서 김치말이밥을 먹을 때, 이렇게 오래된 집들은 조선말부터 있었겠지 생각했었다.
전에 비변사등록에서 발견한 “거추리”라는 이름에 잠깐동안 흥미를 느껴서 글을 올렸었다. 우리나라가, 국사연구를 굉장히 많이 한다고 알고있지만 작은 일들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쓰지 않고 있었다.
결국은 박사논문꺼리가 없는 쪽에는 연구를 하지 않고있다. 아마 앞으로 학위꺼리가 없어지면 작은 일들에 대해서도 연구하시겠지.
특히나 아쉬운 것은 음양사 따위의 일본 소설에 등장하는 “에도 시대의 상세한 지도”같은 것들이 우리나라에서는 불가능한 것 같을 때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같은 소설에서 약간씩 보이기도 하지만, 조선시대 한양의 도로망같은 것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글은 찾기 힘들다.
웃기는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내가 100원을 번다면, 다른 누군가는 100원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꾸준히 하고있다. 혹은 100원을 벌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한 것일지도 모른다. 정말 그럴까?
내가 담배한대를 피우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던 “담배한개비”라는 재화를 소멸시켜버림으로써 다른 골초가 담배피울 수 도 있었던 기회를 내가 뺐어온 것일까? 아니면, 담배회사로 하여금 담배농가로부터 담뱃잎을 구매하도록 해서, 경제가 순환되도록 하여, 결국은 다른 골초가 구매능력을 가지도록 도와준 것일까.
한남동 뉴욕스테이크에서 덜익힌 소고기를 먹는 것이나, 인사동에서 랍스터를 먹는 것은 어떨까.
방금 다 읽었다. 어제 반디에서 샀고 오늘 읽었으니, 간만의 속독. “과학”을 주제로 한 책들은 거의 다 재미있다. 중학교때 깨알같은 글씨의 코스모스를 읽을 때 부터다. 우주과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중에도 많은 이들이 코스모스 읽었었쥐…
요즈음은 “수학의 몽상” 처럼 수학관련한 책은 몇번 보았고 물리학 쪽은 잘 안보았었다. 전공은 했지만, 결국 천문학자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랬을까.
정재승의 과학콘서트 오랜만에 잡아본 이 책은 역시.. 꽤 재미있었다.
72년 생이니까 나보다 한살 어리다. 거의 같은 시기를 살아온 사람.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 분입니다. 기억하는 이도 있을지 모르겠는데, 전에 TV에서 서울대출신의 스님들이 다큐멘터리에 나온 적이 있는데, 그 스님들이 이분의 제자들이었습니다.
서울대 불교연구회의 멤버들이 어느날 “강정진거사”를 만난다. 앉은 자리에서 18시간동안 대화를 나눈이들은 그자리에서 사제의 인연을 맺는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학생들은 머리를 깎고 산으로 들어간다.
대학교 이름도 그렇고, 스토리도 그렇고 뭔가 그럴싸합니다. 아마 저도 이분을 실제로 만나보면 깊은 감화를 받아 머리를 깍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책을 본 느낌은 좀 다릅니다.
보통 이런식의 책을 쓴 사람들은.